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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링스 은행 파산 사건 — 닉 리슨은 어떻게 233년 은행을 무너뜨렸나

베어링스 은행 파산 사건 — 닉 리슨은 어떻게 233년 은행을 무너뜨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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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년 은행을 무너뜨린 단 한 사람

1995년 2월, 영국 금융계를 뒤흔든 사건이 벌어졌다. 무려 233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명문 베어링스 은행이 단 며칠 만에 파산한 것이다. 영국 여왕마저 재산을 맡기던 이 은행을 무너뜨린 것은 외부의 거대한 위기가 아니라, 지구 반대편 싱가포르에서 근무하던 스물여덟 살의 트레이더 단 한 명이었다. 그가 몰래 쌓아 올린 손실은 8억 2700만 파운드로, 은행이 가진 전 재산을 넘어서는 금액이었다. 결국 이 거대한 은행은 단돈 1파운드에 팔려 나갔다. 이 글에서는 한 사람의 거짓말이 어떻게 200년 넘은 제국을 무너뜨렸는지, 그 전 과정을 되짚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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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이 재산을 맡긴 명문 은행

베어링스 은행은 1762년에 문을 연,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상업은행이었다.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곳은 단순히 돈을 다루는 곳이 아니라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다. 1803년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광활한 루이지애나 땅을 사들일 때 그 막대한 자금을 댄 곳이 바로 베어링스였다. 영국 왕실조차 이곳에 재산을 맡겼고, 사람들은 베어링스를 여왕의 은행이라고 불렀다. 두 번의 세계대전과 수많은 경제 위기를 모두 견뎌 낸, 그야말로 영국 금융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233년이라는 시간의 무게

베어링스가 쌓아 온 시간의 무게는 숫자만으로도 압도적이었다. 무려 233년, 열 세대가 넘는 세월을 이어 온 은행이었다. 그런 은행이 한순간에 떠안게 된 손실은 8억 2700만 파운드에 달했고, 이 금액은 당시 은행이 보유한 자기자본을 통째로 넘어서는 규모였다. 쉽게 말해 은행이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도 메울 수 없는 구멍이었다. 문제는 이 어마어마한 손실이 단 한 사람의 손에서,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자라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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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스타 트레이더

손실을 만든 사람의 이름은 닉 리슨이었다. 평범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20대 중반에 베어링스의 싱가포르 지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파생상품, 그중에서도 일본 증시의 오르내림에 돈을 거는 선물 거래를 맡았다. 처음 몇 년 동안 그는 눈부신 성과를 냈고, 회사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 주는 스타 트레이더로 떠올랐다. 런던 본사는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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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에게 맡긴 생선 가게

그런데 리슨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치명적인 권한이 하나 있었다. 그는 거래를 직접 하는 사람이자, 동시에 그 거래를 정산하고 기록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원래 이 두 역할은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반드시 분리되어야 한다. 그러나 작은 지사였던 싱가포르에서는 리슨 한 사람이 두 역할을 모두 쥐고 있었다.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통째로 맡긴 셈이었다. 이 구조적 허점이야말로, 훗날 벌어질 모든 재앙의 씨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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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거짓말의 시작

훗날 리슨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손실을 만회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털어놓았다. 딱 한 번만 더 거래하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시작은 아주 작았다. 부하 직원의 사소한 거래 실수로 생긴 몇 만 파운드의 손실을 잠시만 숨겨 두려던 마음이었다. 그러나 시장은 그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고, 만회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더 큰 손실로 돌아왔다. 그 작은 거짓말은 상상도 못 할 속도로 몸집을 불려 갔다.

모든 것을 삼킨 88888 계좌

리슨이 손실을 숨긴 방법은 놀랍도록 단순했다. 그는 88888이라는 특별한 오류 계좌를 만들었다. 원래는 사소한 거래 실수를 임시로 담아 두는 계좌였지만, 그는 이곳을 자신의 모든 손실을 몰아넣는 비밀 창고로 사용했다. 런던 본사에는 이 계좌를 철저히 숨긴 채 겉으로는 엄청난 이익을 내는 것처럼 보고했고, 감사가 계좌를 확인하려 하면 서류를 조작해 돈이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꾸며 냈다. 아무도 그의 두 얼굴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계좌 속 구멍은 걷잡을 수 없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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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성적표의 이면

겉으로 드러난 리슨의 성적표는 더없이 화려했다. 그는 회사에 막대한 이익을 벌어다 주는 최고의 트레이더로 기록되었고, 런던 본사는 그 수익에 열광하며 두둑한 보너스까지 안겼다. 그러나 장부 뒤편의 진실은 정반대였다. 88888 계좌 안에서는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고, 그 규모는 이미 은행 전체를 위협하는 수준에 다다랐다. 모두가 박수를 보내던 순간에도 진짜 숫자는 정확히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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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 지진이 당긴 방아쇠

운명의 방아쇠는 뜻밖의 곳에서 당겨졌다. 1995년 1월 17일, 일본 고베에서 거대한 지진이 발생한 것이다. 리슨은 일본 증시가 오른다는 쪽에 어마어마한 돈을 걸어 둔 상태였다. 그러나 지진 소식에 증시는 곤두박질쳤고, 그의 손실은 순식간에 두 배로 불어났다. 다급해진 그는 시장을 되돌리려 더 큰돈을 쏟아부었지만 상황은 오히려 더 악화될 뿐이었다. 2월 23일,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한 리슨은 짧은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싱가포르에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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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만에 끝난 233년

리슨이 사라진 뒤 베어링스의 경영진이 진실을 알게 된 것은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한 임원은 그가 천문학적인 이익을 내고 있다고 믿었으나 그 숫자가 사실은 정반대였다는 걸 알았을 때 눈앞이 캄캄해졌다고 회고했다. 은행의 누구도 싱가포르의 한 직원이 회사 전체를 삼킬 손실을 쌓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조금만 견제 장치가 있었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1995년 2월 26일, 베어링스 은행은 스스로 파산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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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돈 1파운드에 팔린 제국

이 사건이 남긴 숫자는 지금도 금융 역사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한 사람이 만든 손실은 8억 2700만 파운드, 무너진 은행의 나이는 233년이었다. 그리고 그 유서 깊은 은행이 최종적으로 팔려 나간 값은 놀랍게도 단돈 1파운드였다. 네덜란드의 금융그룹 ING가 모든 빚을 떠안는 조건으로 베어링스를 사들인 것이다. 수백 년의 명예가 단 하나의 오류 계좌 앞에서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이 숫자들이 고스란히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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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리슨의 최후

모든 것을 무너뜨린 닉 리슨은 도주 끝에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붙잡혔다. 이후 싱가포르로 넘겨진 그는 재판을 받고 6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 그는 대장암 판정을 받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결국 4년 남짓 복역한 뒤 풀려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회고록을 세상에 내놓았고, 그 이야기는 훗날 유명 배우가 주연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한때 은행을 삼킨 문제의 트레이더는 지금 위기 관리와 투자 심리를 주제로 강연을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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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옹성이 남긴 교훈

베어링스는 200년이 넘도록 전쟁과 공황을 모두 견뎌 낸 철옹성이었다. 그러나 그 거대한 성을 무너뜨린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었다. 견제받지 않은 단 한 사람과, 그를 맹목적으로 믿어 버린 시스템이 전부였다.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권한이 주어지고 아무도 그것을 감시하지 않을 때, 233년의 역사도 단 며칠 만에 사라질 수 있다. 이 사건 이후 전 세계 금융기관은 거래와 정산의 분리, 그리고 내부 통제의 중요성을 뼈아프게 되새기게 되었다. 지금 우리 곁의 든든해 보이는 성벽은, 과연 얼마나 튼튼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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